리나이성
중국 자연자원부 제1해양연구소
바다는 생명의 요람이자 바람과 비의 온상, 대기의 담요, 자원의 보고, 무역의 창구, 국방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푸른' 횃불은 항상 인간 사회의 문명과 진보를 이끌어 왔고 해양 문화는 늘 "바다의 탐색"이라는 흥망성쇠를 동반해 왔으며, 인류에게 가장 적절하고, 가장 거칠고, 가장 공정한 보상과 처벌을 주고 있다.
바다는 수백, 수천개의 강을 수용할수 있을만큼 광활하고 넓은 도량을 지니고 있다(海纳百川,有容乃大). 너그러움과 관용은 바다의 특성이며 해양 문화의 핵심이다. 청장고원(青藏高原)의 융기로 인해 하늘이 북서쪽으로 기울고 땅이 남동쪽으로 파이는 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이 생겨났고 이로써 샘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진흙과 모래를 포함한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게 되었다. 하지만 바다는 흘러드는 모든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포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다의 아량"이고 "바다의 패기"이다.
최고의 선은 물처럼 사심없이 베푸는 것이다(上善若水,无私奉献). 사심없는 선(善)은 바다의 미덕이며 해양 문화의 기초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도 불만이 없으며, 더러움을 안고가도 싫어하지 않는다. 바다는 자비로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수중 세계의 모든 생명을 보듬어 주고, 거대한 양팔로 바다에서 경쟁하는 수백, 수만 척의 배를 받쳐주며, 심지어 무한한 공간과 자원을 인류에게 사심없이 내어다 주고 있다.
만물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生生不息, 运动不止) . 생기와 활력은 바다의 품성이며 해양 문화의 내포이다. 수천 미터 높은 산도 불과 3억~5억 년 만에 황토더미로 변하지만, 40억 년 된 바다는 여전히 젊고 활력이 넘친다. 밀물과 썰물이 교체되고 파도가 끊임없이 출렁이는 역동적인 일상이 지금도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Ⅰ. 해양과학기술과 문화의 심층 융합
해양 과학과 기술은 탐험과 인식에서 시작되고, 해양 문화는 지식의 축적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해양과학기술은 문화의 기초이고, 해양문화는 과학기술의 승화라고 볼수 있다. 양자간 관계는 상호의존, 상호추진, 상호진보 및 인과(因果) 관계이다. 해양관련 문명이 발전하는 모든 시점과 중대 해양사건의 발생과 발전은 늘 해양 기술과 해양 문화의 영향이 동반되고 있다.
해양 과학자 중에는 문화·예술계의 거장이기도 한 경우가 많다. 과학자들은 종종 뛰어난 문화·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일부 "문화·예술인" 또한 강력한 과학적 인지 능력을 갖고 있다. 이는 과학분야와 문화·예술 분야 사이에 혁신에 대한 소질이라는 공통된 요구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소질은 개인의 강한 사고력, 호기심, 질문, 이해력, 창의력 등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뛰어난 해양과학 연구 결과는 높은 수준의 해양 문화를 반영하고 있으며, 신비로운 수중 세계는 풍부한 문화·예술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산호초 군집은 마치 살아 있는 미술관과 같다.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 작품은 종종 참신한 학술적 아이디어를 생산할 수 있듯이 과학적 영감에는 문화·예술적 계몽이 필요하고, 그 발전에는 기술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해양 과학과 기술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자연적 변화의 법칙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해양 문화는 '수만 년' 시간 척도의 인간 활동을 상대로 인간과 자연 간 상호 작용 과정을 밝히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오늘날 기술과 문화가 통합되면서 인간, 환경, 자원 간의 상호 연결과 영향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광활한 바닷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퇴적물은 부드러운 육지 진흙과 모래로부터 단단한 퇴적암으로 변하면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방대한 양의 문화·예술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 진화에 대한 온전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 약함에서 강함에 이르기까지의 인간 활동 정보에 대한 보고이기도 하다. 육지의 다양한 문화층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기껏해야 관중규표(管中窥豹)에 불과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첫째, 수직적 연속성이 없다. 어떠한 고고학 유적지도 특정 시대의 특정한 문제만을 증명할 수 있을 뿐, 무에서 유로의 역사적 진화에 대한 답은 줄 수 없다. 둘째, 가로로 확장하기 어렵다. 아무리 많은 문화재가 밀집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점 대 점'의 분석과 판단만 할 수 있을 뿐, 역사에서 '한 산이 두 나라를 가르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 '점 대 점'의 통찰만으로 역사의 전모를 복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다는 이런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 수직으로 보았을때 가장 원시적인 "기원 정보"에서 오늘날까지 연속으로 기록할 수 있고 가로로 보았을때 끊임없이 드넓고 무한히 확장 가능하며, 우리들에게 다학제, 네트워크화, 디지털화, 실시간화, 연속적 해양 문화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시간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맥락은 '기원에서 마감까지'를 강조하고, 문화 탐구는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기원 추적"은 그럼으로써 심오한 문화적 화제이며, 해양 과학기술의 신의 한수이기도 하다. 최근 몇년간 해양과학은 “전지구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으며 수십억 년 전의 고기후, 고환경, 고해양에서부터 오늘날의 지구 온난화, 극지의 해빙, 해수면 상승에 이르기까지 탐구 수단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되고 있으며 연구 수준도 또한 끊임없이 심화되고 있다. 자연의 어떠한 미미한 변화도 인간 사회에 "나비 효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면 홍수, 가뭄, 지진, 태풍, 화산, 산사태 등 자연재해의 발생과 발전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해양은 천연자원의 보고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수중 고고학과 수중 난파선은 대체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자원이다. 전쟁 중에 수많은 군함이 침몰했고, 태풍에 의해 전복된 선박들도 수없이 많았으며, 심지어 사람들은 강과 바다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를 침몰시키기도 했다. 더욱이 똑똑한 사람들은 깊은 바다속에 희귀한 보물들을 봉인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난파선의 발견과 인양은 높은 수준의 해양 기술 지원과 첨단 해저 엔지니어링 장비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6척의 난파선은 여전히 전세계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바다로 끌고 있는데 그중 '아토차호' 한 척만 무려 40톤에 달하는 보물을 싣고 있다. 대략적인 추산에 따르면, 지금까지 인양되지 않은 다양한 난파선의 수는 적어도 "수백만 척"에 달하는데 이는 바다 속에 잠자고 있는 "고대 선박"이 거대한 해양 문화 자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적 문화를 진정으로 재현하려면 더 높은 수준의 기술적 지원이 필요하다.
Ⅱ. 황해 연안의 역사 인물 탐구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위치한 황해는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뛰어난 인재가 집결된 곳이다. 역사상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이 바다를 바라보기 위해 이곳으로 올라왔고, 서복(徐福)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황해라는 이름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해양 문명의 발전 과정에도 새겨져 있다. "어업과 소금의 이익, 선박 항해의 편리" 역시 황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1. 소금 성자 숙사씨(夙沙氏)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다"
중국과 한국은 모두 세계 최초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을 개발한 나라이다. 돌이켜 보았을때 바다 소금은 수많은 왕조와 나라의 생명과 혈맥이었다. 한국의 서해안은 만(海湾)이 밀집되어 있어 집중적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이 형성되었다. 중국은 황해 연안의 쟈오저우만(胶州湾), 구전커우만(古镇口湾), 치즈만(棋子湾), 하이주만(海州湾)을 비롯한 쟝수성(강소성,江苏省) 북부의 얕은 바다 전체가 중요한 해염 기지이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서 중국은 소금성자(盐圣) 숙사씨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숙사씨는 인류가 바다로 나아가는 여정을 개척하였고, 해양 자원의 개발과 활용의 첫 걸음을 내디뎓다. 바다소금의 등장은 인간의 지능발전으로 이어졌고 최초의 "해양 문명"을 형성하였다.
2. 중국 초대 황제 진시황, "바다를 이용한 역량 강화"
2천여 년 전, 뛰어난 재주와 큰 포부를 가진 진시황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군현제(郡县制, 군현제는 중국 진시황이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어 황제가 직접 임명한 관리로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제도임)를 대표로하는 중앙집권 정부 제도를 수립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국 전역은 하룻밤 사이에 노예 사회에서 봉건 사회로 전환되었다. 그와 비슷한 인물로는 로마의 카이사르가 있는데, 그는 진시황과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고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였다. 더불어 카이사르는 유언에 알렉산드리아항을 개발 하도록 명확이 요구하였다. 반대로, 진시황의 조상들은 모두 서역의 황토고원에 살았지만, 그는 높은 안목으로 황해의 서쪽에 랑야(琅琊)항을 건설하고, 랑야대와 랑야성을 만들었다. 당시 랑야항은 알렉산드리아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하였고, 이 두 항구는 세계적으로도 2대항구로 불렸으며 대규모 해상운송의 서막을 열었다.
진시황은 15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4번 동순(东巡)하였고 랑야대에 세 번 올랐으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비석을 만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9년, 그는 직접 랑야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지부만(芝罘湾)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중국 역사상 직접 함대를 이끌고 긴 항해를 끝마친 첫번째 황제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해서 인가? 사실 이 모든 것은 "바다를 이용한 역량 강화(向海图强)"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진시황의 실적을 불로불사 약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날조하였다. <사기>에서 언급된 진시황의 폭정과 그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비난은 오늘날 끊임없이 발굴되는 <진죽편>(秦竹简)을 통해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진시황을 고의로 폄하해야만 한고조 유방의 진나라를 토벌하는 행위가 하늘을 대신하여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라 합리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서복동도(徐福东渡), 항해의 역사 창조
기원전 220년, 서복은 진시황의 성지를 받아 3,000여 명의 청년 남녀와 약 100척의 배를 이끌고 랑야대 아래의 랑야항으로부터 출항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중 한국의 제주도를 거쳐가면서 이곳에 상륙하여 한동안 머물렀다. 제주도의 '서복비'에는 '서불기례일출(徐巿启礼日出)'이라고 새겨진 석조 흔적이 남아 있다. 제주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서귀포'는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희망에서 유래되었다. 심지어 서복회관, 서복길, 서복천 등이 있는데 이는 중국보다 더 밀집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복은 왜 동쪽으로 항해했을까? 서복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왜 서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에 대해서는 더 탐구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세계 최초의 대규모 장거리 항해를 통해 '해상운송'의 역사를 창조한 활동으로 이에 대한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4. 장보고의 '적산명신(赤山明神)'을 통한 한중일 연결
황해 서쪽 해안에 위치한 산동성(山东省) 스다오(석도, 石岛) 적산에 '적산명신'이라고 새겨져 있는 거대한 황동 조각상이 있는데 그 모양은 중국의 3대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와는 전혀 다른 형태다. 이는 한국, 중국, 일본의 "바다의 신"으로, 황해를 항해하는 한국, 중국, 일본 선박을 보호하고 있다. 산기슭에는 당나라 때 중국 군대에 입대후 뛰어난 실력으로 큰 공을 세워 대장군으로 진급한 한국 출신 장보고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이 있다. 그때 23팀의 견당사(遣唐使-당나라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가 석도에서 상륙하여 육로를 통해 장안으로 이동하였다. 수많은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문화교류의 사자 신분으로 오랫동안 중국에서 유학을 했으며 이는 한국과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 기원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를 필요로 하고 있다.
Ⅲ. 역사상 유명한 황해해전에 대한 간략한 검토
황해는 예로부터 군사 전략적 요충지이자 전쟁의 핵심이다. 역사상, 수많은 시시비비로 인해 황해에서 인류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해전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바다속으로 침몰된 많은 군함들은 풍부한 문화적 의미와 기술적 단서를 담은채 시대속에 묻혀 현시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1. 황해 서해안 군함 방화 사건
900년 전, 황해의 서쪽 해안에서 스릴 넘치는 해전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영국인에 의해 "인류 역사를 바꾼 100차례 전쟁"이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바로 탕다오만(唐岛湾大海战) 대해전이다.
1161년, 금나라 하이링왕(海陵王) 완옌량(완염량, 完颜亮)은 전국의 힘을 모아 군대를 네 부대로 나누어 남쪽으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였다. 600척의 군함과 7만 명이 넘는 선원을 태운 거대한 함대가 교주만으로 부터 출발하여 항주만에 도착후 육군과의 협공을 통해 남송을 단번에 멸망시키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사태속에서 남송 마보군 부총사령관 이보우(이보, 李宝)가 선두로 나섰다. 그는 단지 120척의 군함과 급히 모집한 궁수 3,000명 밖에 없었지만, 그의 용기는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반대로, 금나라 함대는 많은 병력과 거대한 군함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교와 병사들은 북쪽 출신이기에, 바람과 파도를 두려워하고 해전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선원의 대부분은 강제 징집되어 불만을 품은 한족이었다.
이보우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함대를 이끌고 당도만으로 곧장 향했다. 군함이 가까워지자 그들은 금나라 군대의 돛을 향해 화약 화살을 쏘았다.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수천 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면서 금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남동풍에 의해 불길을 더욱 커져갔고, 순식간에 금나라의 전함이 불길에 휩싸였다. 벽력포도 금나라 군대에서 터지면서 공기가 연기로 가득 찼다. 남송 수군의 철갑 고속정은 이 기회를 틈타 금군의 진지로 돌격하여 근접전을 벌였다. 결국 금나라 군선 수백 척이 불타고, 완연(完颜), 정쟈누(郑家奴)등 사령관 등 6명이 전사하며, 3,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는 인류 역사상 3,000명의 병력으로 70,000명의 병력을 물리치고, 120척의 군함으로 600척의 군함을 침몰시킨 소수가 다수를 전승한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이 전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총기를 대규모 해전에 사용한 전투이자 역사를 새로 쓰는 전설의 해전이기도 하다.
2. 쓰시마 해협 전투
황해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쓰시마 해협은 황해와 일본해를 연결하는 유일한 수로이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20세기 초, 떠오르는 두 해군 강국인 일본과 제정 러시아는 이곳 바다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차르 정부는 로즈드빈스키 중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긴급히 제2태평양 함대를 이끌고 발트해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극동으로 향하도록 명령하였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东郷平八郎)는 러시아 함대의 보급 상황을 분석한 후 러시아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것이며 또한 반드시 쓰시마 해협을 거쳐갈 것으로 판단하였다. 해전이 일어나기 7일 전, 도고 헤이하치로는 전체 함대에 쓰시마 해협에서 매복하여 러시아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였다. 1905년 5월 27일 아침, 러시아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 진입하는 동시에 일본 함대에 포위되었다. 단 하루 사이에 일본군은 러시아 제2태평양 함대를 거의 전멸하고 러시아 해군 사령관을 생포하였다. 최종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러시아 군함 38척 중 21척이 침몰하고 9척이 포로로 잡혔으며, 4,830명이 전사 하였고 5,917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대로 일본군은 단지 어뢰정 3척만 잃었고, 117명이 전사 하였으며, 587명이 부상당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쓰시마 해전은 근대 해전 역사상 작은 규모가 큰 규모를 물리친 유명한 전쟁이다. 일본은 어뢰정 3척만을 잃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러시아 함대는 거의 전멸당했다.
쓰시마 전투의 결과는 서방국가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운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지형도 바꾸어 놓았다. 한때 세계적으로도 강했던 러시아 해군은 이 좌절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고, 해전의 실패로 러시아 차르의 통치가 흔들렸다. 반대로 일본은 이를 통해 세계 해군 강국의 반열에 진입했고, 극동의 선두 국가가 되었다.
3. 갑오해전(甲午海战)을 통한 사색
갑오해전 또는 황해해전이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1894년 9월 17일에 시작되었으며 이는 중일 갑오전쟁 기간에 일어난 최대 규모의 해전이다. 청나라의 북양함대(함대 12척)와 일본 연합함대(함대 12척)가 이번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투는 5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중국은 군함 5척을 잃고 850명이 전사하였고, 일본은 선박 몇 척이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침몰한 선박은 없는 상태로 끝이 났다.
갑오전쟁 패배는 30년 이상 지속된 청나라의 서구화 운동의 실패와 현대화의 성과, 그리고 중국 인민들의 민족 부흥을 위한 노력들이 함께 산산 조각났음을 의미한다. 영토 할양과 배상금 지불, 그리고 주권 상실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새로운 단계로 밀어갔고, 중국의 반식민지적 지위를 크게 심화시켰으며, 중국의 국제적 지위 또한 급격히 하락되었다. 반면에 갑오전쟁은 민족의 생사존망을 만회하기 위한 중국인민의 시민운동을 크게 자극하였다. 자산계급은 유신변법 운동과 민주혁명운동을 일으켰고, 중국인민들도 자발적으로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각종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대만 등 전략적 요충지 확보를 통해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에 박차를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극동 지역으로의 침략과 확장을 용이하게 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부상하는 자본주의 강국이 되었다.
극동 지역의 상황에 있어서,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국을 분열시키려는 제국주의의 광란을 불러 일으켰고, 극동지역을 재분배하려는 제국주의 열강 간 경쟁을 심화시켰다.
4. 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7만 명이 넘는 "유엔군"이 부산을 우회하고 제주해협을 건너 황해 동해안의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하여 인천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조선인민군을 전선과 후방 두 갈래로 갈라 놓았다.
전쟁 전,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모든 반대를 무시하고 인천 상륙을 제안하였다. 그는 인천이 한반도 서해안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 갑자기 상륙하면 북한군의 주요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천은 서울의 관문으로, 불과30km 떨어진 곳에 있기에 착륙 후 바로 서울을 공격한다면 정치적 영향이 아주 클 것으로 예상하였다.
9월 15일 이른 아침, 구축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다양한 미군 군함이 예정대로 좁은 수로에 진입하여 월미도(月尾岛)로 향했다. 오전 6시 27분, 첫 번째 상륙정이 상륙 하였고 두 번째, 세 번째 상륙정이 잇따라 상륙하였다. 오전 7시 30분, 미군은 월미도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였고 오전 7시 50분 섬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그들은 이후 유엔군이 도착할 때를 대비해 임시 댐을 건설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유엔군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강화되었고, 중국과 소련이 한국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하게 되면서 전쟁은 지속되고 확대되었다. 전반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전투였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강산이 수십번 변하면서 황해는 한때 불길과 연기로 가득찬 전쟁터로부터 현재 문명간 교류를 진행하는 푸른 유대로 바꾸어졌다.
수천 년간의 풍파를 거치면서 황해는 군사 전략가들의 전쟁터에서 인류문명이 공동 번영하는 바다로 변했다. 거센 파도 속에 묻힌 검의 그림자는 이제 태양 아래서 기술과 문화의 찬란한 결정체로 변하고 있다. 기술과 문화는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해양과학기술은 인민의 복지를 창조하는 물질적 보장이며, 해양문화는 인민의 정신적 양식이다. 아름다운 산과 맑은 바닷물,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날아다니는 모습, 쾌적한 기후와 살기 좋은 환경은 해양 기술과 해양 문화의 공동 노력의 결과이다. 도서 관광, 해변 산책, 바다 구경과 파도 소리 듣기, 여름 휴가와 레저활동 모두 평화롭고 안정적인 환경속 사람들의 문화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바람과 파도에 맞서 싸우고, 파도를 가르고, 폭풍우를 경험하고, 풍파를 타는 것은 모두 해양 과학기술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다.
황해는 심오한 과학, 기술, 문화 유산을 담고 있기에 해양과학기술 종사자와 해양 문화 종사자의 공동 노력, 그리고 황해 주변 국가, 특히 황해 서쪽 해안의 중국과 동쪽 해안의 한국에 있는 해양 종사자의 공동 노력이 필요하다. 멀지않아 황해는 지역 협력의 모델이 될 뿐만 아니라, 글로벌 해양 거버넌스에 ‘한중간의 지혜’에 기여하고 바다를 매개로 평화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